1996. 6. 『한국인물유학사』3, 한길사


鹿門 任聖周


金  炫


Ⅰ. 鹿門의 生涯

 1. 成長 過程

 2. 入仕初期의 活動

 3. 晩期의 牧民活動

Ⅱ. 鹿門의 哲學

 1. 鹿門哲學의 形成

 2. 本體論

 3. 人性論

 4. 修養論

Ⅲ. 鹿門哲學의 意義

                          


I.  鹿門의 생애


 1.  成長 過程


  鹿門 任聖周은 肅宗 37년( 1711년 ) 忠淸道 淸風( 충북 제원군 )에서 출생하였다. 豊川이 본관인 그의 집안 사람들은 고려 말부터 관계에 진출하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대대로 관직을 맡아왔으나, 그의 증조부 때부터는 단명하여 벼슬이 없거나 지방관에 머무는 정도여서 녹문 당시의 가세는 그렇게 융성한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1)   아버지 老隱 任適(1685-1728)과 어머니 坡平 尹氏는 녹문을 비롯하여 모두 오남이녀를 낳았는데, 녹문은 그 가운데 두번째 아들이었다.

  녹문은 어렸을 때부터 입신에 뜻을 두기보다는 유학의 본령인 성인이 되기 위한 공부에 마음을 쏟았으며, 특히 16세 때 율곡의 글을 읽고서는 ‘天人合一’ 경지를 성찰하였다고 하였는데,2)  이는 그가 평생에 걸쳐 이룬 학문적․실천적 업적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다.  녹문의 氣一元論的인 本體論과 人性論은 모든 인간이 천도를 체현하여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性善說의 교지를 새로운 시각에서 재구성한 것이며, 관직에 있던 시절 그가 행한 갖가지 치적도 성학에 입각한 교화 사업으로 일관되어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녹문은 14세 때( 1725년 ) 함흥판관을 제수받은 아버지의 임소로 이거하였다가, 2년 후에는 서울로 돌아와 그곳에 모여 살던 친지들과 함께 생활하였으나 그 이듬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청주로 내려 왔다.3) 이곳에서 그는 선친의 제사를 받들면서 본격적으로 학문 연구에 몰입하였는데, 이론 공부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집안의 儀禮를 정비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도 적극성을 보였다.4)

  淸州에서의 녹문의 수학기는 18세 때( 1729년 )부터 26세 때( 1737년 )까지 8 년 동안 이어지는데, 이 사이에 그는 서울 근교에 거주하던 陶庵 李縡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5) 학문적인 내용을 담은 서신을 교환하였으며,6) 그밖에도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학들과 함께 어울려 경전을 강독하고 그 내용을 토론하는 회합을 가지는 등, 과거 준비에 힘쓰는 것 이상으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23 세 때( 1734년 )에는 홀로 華陽山에 들어가 <<中庸>>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였으며,7) 25세 때( 1736년 )에는 宋浚吉의 후예인 宋明欽, 宋文欽 등과 함께 회덕의 玉溜閣에 들어가 <<大學>>을 강독하였는데,8)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리학의 이론인 理氣心性의 문제에 대해 매우 치밀한 분석을 가하는 공부를 수행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2.  入仕 初期의 活動


  녹문이 생존하였던 조선 후기를 포함한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민중에게 안정된 삶의 길을 제공하고자 하는 양식있는 지식인의 의식은 대체로 그 자신이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오름으로써만 현실적인 효과를 드러낼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경우 그와 같은 관직에 오르는 정상적인 코스는 科擧라고 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다.  행장의 기록에 의하면, 녹문은 그의 나이 22세 때에 어머니의 뜻에 따라 司馬試(生進科)에 응시하였다고 한다.  이 때에 그가 쓴 책문은 시험관을 크게 감동시켰다고 하나, 사마시는 급이 낮은 과거로서 여기에서의 합격이 곧 벼슬자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녹문이 실제로 관직에 오른 것은 사마시에 응시했던 때로부터 17년이나 지나서, 그의 나이 39세가 되던 때였다.  이 당시에 녹문은 서울 근교에 거주하였었는데, 경학을 하는 선비로서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고 있었으므로, 대과에 합격하지는 못하였지만, 학행으로서 천거되어 벼슬자리를 얻게 된 듯하다.

  世子翊衛司洗馬는 그가 처음으로 제수받은 관직이다. 이 시절 녹문은 종종 세자(장헌세자)를 위한 강연에 入侍하였고, 그때마다 經史에 관한 그의 학식을 드러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9) 녹문은 41세 때에 익위사 侍直(정8품)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에는 宗簿寺(왕실의 계보 담당 관서)로 자리를 옮겨 主簿(종6품)의 직을 맡았다. 그러다가 1754년 가을, 녹문의 나이 43세 때 외직으로 발령을 받아 任實縣監으로 부임하게 되었다.10)

  임실현은 오늘날의 전라북도 임실군에 해당하는 지역으로서 당시로서는 고을의 규모가 작을 뿐 아니라, 경사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였기 때문에 중앙정부나 감영의 감독이 용이하지가 않아 토호 및 아전들에 의한 지역내의 부조리가 극심한 곳이었다.  따라서 내직에 있던 관리가 흔쾌히 여길 임지는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지나, 녹문은 부임 초기부터 상당히 의욕적인 행정활동을 전개하였다.

  부임 직후 녹문이 가장 먼저 시행한 사업은 白徵에 관한 민원을 수집하여 그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한 일로 보여진다.  量案에는 농지로 올라 있으나 실제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어 버려진 땅(量後陳)에 백징을 가하는 폐단이 자신의 임지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된 녹문은 면세 조치를 취함으로써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하였다.11)

  녹문이 임실현에서 행한 치적은 그밖에도 補民廳이라고 하는 지방 관청에서 고을의 농민들에게 부과하던 稅米를 폐지한 일, 氷丁의 폐단을 혁파한 일, 진상품을 나르는 부역을 면제한 일, 왕명사신이 고을에 행차할 때 역졸들을 접대하는 일에 수반되었던 부작용을 해소한 일 등을 들 수 있다.

  읍의 살림살이를 위해 설립된 보민청은 그 운영비를 統․戶에 일률적으로 부과해 왔었는데 그 액수가 적지 않아 큰 민원이 되었었다. 녹문은 자신의 녹봉을 덜고 부호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재원을 조성함으로써 보민청의 비용을 충당케 하는 방법으로 이 지방세를 폐지하였다.12) 氷丁이란 하절기의 수요를 위해 겨울에 얼음을 캐는 일인데, 이 빙정의 명분으로 물가에 위치한 마을에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어 왔었다.  녹문은 이 세금이 사실상 白徵이나 다름없다고 판단하고, 관청의 경비 일부와 結役米를 사전에 운용하여 취한 이자를 가지고 빙정의 용역비를 마련하도록 하여, 일부 마을에 편파적으로 부과되던 세금을 폐지하였다.13)   진상품을 나르는 부역과 사신의 수행 역졸 접대가 야기한 민폐는 빙정의 폐해보다 더욱 심각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진상품의 운반은 읍내의 3 동에서 장정들을 차출하여 그 일을 담당케 하였는데, 그 일이 고통스러워 도망함으로써 농사마저 짓지 못하는 일이 빈발하였으며, 사신을 수행한 역졸의 접대는 읍내의 영세 민가에서 담당하였는데 한 번 그 일을 치루고 나면 그 집은 풍지박산이 나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고 한다.  녹문은 관청의 비용으로 재원을 마련하여 진상품을 운반할 때마다 말을 세내어 장정들의 등짐을 대신하도록 조치하였으며, 부호들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待賓阮이라 명명한 접대 전용 가옥을 짓고 비품을 마련하는 한편, 관에서 기금을 출연하여 음식 값을 충당케 함으로써 民家에서 사신의 수행원을 접대하는 데 따른 폐단을 시정하였다.14)

  대민 행정 이외에 녹문이 특별히 관심을 둔 분야는, 고을의 유생들을 자기가 생각한 바의 바른 학문의 길로 인도하는 교육의 문제였다. 학생을 선발하여 순번대로 書齋에 거처하게 함으로써, 학문을 독려하였고, 한달에 1, 2 차례 가진 강학에서는 그 자신이 스스로 구두와 해석을 지도하였다.

  녹문이 자신의 책무로 여긴 교육 내지 교화의 대상 영역은 유생들뿐 아니라 고을의 民人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녹문은 그의 선배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장 효율적인 민간교화의 수단은 바로 鄕約이라고 생각하고 栗谷 李珥의 西原鄕約을 모델로 하여 이를 시행하였다.15) 이 향약의 성패 여부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찾을 수는 없으나, 녹문 행장의 기록에 의하면, “일년이 지나지 않아 교화시키기 어렵다던 아전과 백성들 또한 죄를 부끄러워하고 선을 귀히 여길 줄 알아 송사가 점차 줄어들고 옥의 감방이 여러번 비게 되었다.”고 한다.16)

  오지의 작은 고을이지만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행정업무와 교화사업을 추진하던 녹문은 丙子年(1756, 45세 )과 丁丑年(1757, 46세) 사이에 그의 형과 동생이 연이어 죽자 벼슬에 뜻을 잃고 낙향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1758, 47세) 관직을 사직한 녹문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충청도 공주 근방의 녹문에 은거하였다.17)


  3.  晩期의 牧民活動


  녹문이 관직을 사임하고 시골(鹿門)에 은거한 것은 그의 학문의 성숙을 위해서는 매우 다행한 일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鹿門先生’이라는 그의 호의 근거가 된 이곳에서 그는 학문에 침잠하였다.  그의 독특한 성리설을 집약한 <鹿廬雜識>이 저술된 시기도 바로 이곳에 은거하던 때였다.  그러다가 1762년, 그의 나이 51세 때, 莊獻世子가 비명에 돌아가고 正祖가 동궁에 오르게 되면서, 녹문은 다시 世子翊衛司의 衛率(종6품) 직에 부름을 받게 된다.  녹문은 이 자리에 약 5년간 있었으나, 그때의 활동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도 동궁의 나이가 어려( 10세 - 15세 ) 특별히 기록에 남길만한 강학의 내용이 없었던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6세 때에는 太倉(廣興倉: 호조 산하의 봉급을 관리하던 관청)의 主簿(종6품)로 자리를 옮겼다가, 58세 때 翊衛司 衛率에 복직하였으며, 이듬해에는 (1770, 59세) 司饔阮(궁중의 음식에 관한 일을 보던 관청)의 主簿 직을 맡았다.  그가 다시 외직에 나아가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쌓게 된 것은 그 다음 해인 辛卯年(1776), 그의 나이 60세 때의 일이다.

  녹문의 두번째 외직 임지였던 楊根君은 오늘날의 경기도 양평군에 해당한다. 그가 이곳에서 행한 일 가운데 기록에 남아 있는 몇 가지는 대체로 任實縣에서 행한 일들과 유사한 유형의 것들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사업의 수행 과정 속에서 드러난 녹문의 奉公精神과 爲民意識은 중년 이전보다도 더욱 강력한 것이었다. 부조리한 사회의 폐단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것을 개선하고자 한 녹문의 자세는 양근군의  官船 제도를 정비한 일에서부터 찾아질 수 있다. 

  양근군은 강을 낀 고을로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배를 부려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수운에서 얻은 수익에 대해 세금을 내는 대신, 大同米등 고을에서 중앙에 상납하는 조세를 무상으로 운반해 주는 부역을 담당하였는데, 바로 여기에서 이들의 생계를 어렵게 하는 폐단이 발생하였다.  京倉에 대동미를 납부할 때 보잘것없는 뱃사람의 신분으로서 그 일을 책임지다 보니, 수납을 담당하는 아전들에게 갖은 착취를 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 때문에 사공들이 배를 잃고 파산하는 일이 속출하게 되자 녹문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녹문은 관선 정비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여  이를 가지고 배를  사서 뱃사람들에게 임차하였으며, 이들을 제도적으로 보호함으로써 운선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18)

  녹문은 양근군수에 이어 다음 임지로서 全州判官을 제수받았으나, 전주 사람들이 현재의 인물을 계속 유임시켜 달라는 상소를 올려, 실제로 그곳에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녹문은 다시 榮川郡守를 제수받았으나, 실제로 이곳에 부임했는지, 그곳에서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이듬해( 1774, 63세)에는 내직으로 불리워 司導寺 僉正(종4품)과 軍資監 正(정3품)을 제수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녹문으로서는 마지막 관직인 成川府使의 직에 임명된다.

  成川府는 평안도에 있는 고을로서 전라도의 任實이나 경기도의 楊根과는 다른 특수한 문제를 안고 있는 곳이었다.  녹문이 임지에 도착하자마자 그를 당혹케 한 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수령의 교체에 따른 鄕官의 신규 인용 문제를 가지고 고을의 토착세력들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인 일이었다.  수령이 임명하게 되어 있는 지방 관서의 직책에 대해 청탁이 줄을 이었던 모양인데, 그 가운데에는 금품을 들고 녹문을 찾아온 이도 있었던 듯하다.  녹문은 이 사실을 대면한 즉시 이의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성천부의 장로들을 소집하고 그들과 함께 의논하여 향관의 임용에 대한 세부 규정을 만들어 이를 이를 반포하였다.19)

  녹문은 이 향관 임용건의 처리를 통해 사심없는 공인의 자세를 보인 후, 본격적인 행정업무를 시작하려 하였으나,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의 공직 생활을 마감하게 된다.  관리들의 사찰을 담당한 사헌부의 관원이었던 慶再觀이라고 하는 인물이 녹문에 대해, “經術에는 남음이 있으나, 고을을 다스리는 일은 능하지 못하다”고 하는 내용의 계문을 올려, 부임한지 불과 20일도 안되어 파직되고 만 것이다.20) 그 직후, 이 문제는 조정에서 다시 거론되었는데, 대사간 李碩載가 녹문에 대한 사헌부의 계문은 무고라고 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이 문제를 야기시킨 경재관이 사헌부 장령의 직에서 파직되었다.21)

  녹문이 관직을 떠난 것은 이처럼 타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그 당시에 그는 스스로 “늙어서까지 벼슬살이를 그치지 않는 것은 꺼려할 일”이라고 말하였으며, 더구나 그동안 공무에 쫓겨 부친의 산소를 이장할 여가마저 갖지 못한 것을 자책하고 있던 차여서 별 미련 없이 임지를 떠나 귀향하였다.  이때, 녹문을 옹호하던 성천 사람들이 비변사에 달려가 소청을 내려 하기도 하고, 그의 수레를 둘러싸고 하루라도 더 머무를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훗날 누군가가 녹문에게 어떠한 덕정을 폈길래 불과 10여일만에 성천 사람들이 그러한 행동을 보였느냐고 묻자, 녹문은 “우연일 뿐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일지라도 내가 백성을 사랑하는 정성을 가진 것을 신묘하게 알게 된 까닭게 그들의 마음에 닿은 바가 있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만일 내가 그곳에 몇 달만 더 있었더라면, 실리가 백성들에게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러한 조짐은 넉넉히 보일 수 있었을 것이다.”22)라고 하였다. 治者의 도덕적 心性이 곧 최선의 治術이라고 하는 이 생각은 유교를 신봉한 조선시대 선비의 원론적인 사고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 녹문 자신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바로 너무나도 분명하여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실천의 원리로 여겨졌을 것임이 분명하다.

  녹문은 관직을 떠난 후 다시 학문에 전념다가 1788년 공주 녹문에서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3)



II.  鹿門의 哲學



  1. 鹿門哲學의 形成


  鹿門 任聖周는 19세 때 서울 근교에서 강학하던 陶庵 李縡를 찾아가 사제 관계를 맺었으며,24) 그 후 청주에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를 시작할 때에도 宋明欽, 宋文欽, 金元行 등 陶庵 문하 또는 그 주변의 학자들과 교유하였으므로25)  도암의 학설이 그의 청년기의 학문적 지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암의 사상은 크게는 율곡 계열의 畿湖性理學의 테두리 안에 있지만, 그 안에서 다시 心을 도덕 실천의 근원으로 이해하려는 主理的(윤리지향적)인 경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녹문은 도암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스승의 그와 같은 사상 내용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한편, 스승과는 상이한 입장을 취하였던 湖西 지역 학자들의 이론을 접하는 기회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 시대는 바로 湖西와 洛下의 학자들이 人物性同異問題를 공동의 관심사로 여겼던 시기였으며, 특히 남당과 입장을 같이 한 병계 윤봉구가 남당과 외암 사이에서 논의되던 문제를 도암에게 가져와 토론을 벌임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湖ㆍ洛의 논변을 유발시킨 때였기 때문이다.26) 

  당시, 도암의 연배인 南塘 韓元震, 屛溪 尹鳳九 등 湖西 지역 학계의 주류를 이루었던 인물들은 人性과 物性의 차별성을 주장하는 人物性異論과 함께 같은 인간 내에서도 사람 사람에 따라 氣質의 차이에 의한 심체의 차별성이 존재한다는 聖凡心不同說을 주창하였는데, 도암은 이를 극력 배척하고 인간의 心體는 聖凡의 구별 없이 똑같이 순수하다고 하는 聖凡心同說을 주장하였다.  양자의 주장을 비교해 보면 도암의 이론은 孟子 性善說의 입장을 계승한다는 점에서 우세한 명분을 가진 것인 반면 남당, 병계 등의 주장은 理氣論的 심성 해석이라고 하는 이론면에서 보다 우세한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心은 활성적인 능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氣로 이해되는데, 이 氣가 차별적인 것이라면 심체의 차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녹문은 스승인 도암의 입장을 좇아 성선설의 계승이라는 명분면에서 절대적으로 우세한  聖凡心同의 說에 적극 찬동하였지만, 한편으로는 氣의 차별성과 心體의 순선성을 함께 주장한 도암의 이론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하는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27)  하지만, 도암의 심설 가운데 心의 보편적인 순선성을  本體氣의 湛一에서 찾고자 했던 사고는 녹문의 후기 철학을 형성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도암 자신은 그것을 그다지 투철하게 설명해 내지 못하였지만, 녹문은 바로 이러한 관점을 일관되게 밀고나아감으로써만 心體의 純善性이 확보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녹문의 그러한 발전된 생각은 도암의 심설에서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며, 자기 스스로의 오랜 동안의 연구를 통해서, 특히 本體氣의 순수성을 주장한 張載의 氣哲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 확립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녹문은 자신이 새로운 氣 개념을 정립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다행히 중년 이후, 하늘의 신령에 힘입어 張子의 湛一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氣質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하게 수만 가지로 다르다고 해도, 그 本體는 단지 湛一한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연후에 비로소 心의 靈明은 바로 氣質의 靈明일 따름이요, 氣 밖에 별도의 靈明한 心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울러 性의 선함도 氣質의 善일 따름이니, 氣 밖에 별도의 선한 성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28)”라고 하였다.

  이러한 자각에 이르기까지의 녹문의 사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다.  [一] 녹문은 心이 작위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氣’로 설명되어져야 한다는 입장을 전제한다.  [二] 그러한 心이 성범의 구별없이 누구에게 있어서나 순선한 것일 수 있기 위해서는 心을 이루는 氣의 순수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三] 그런데, 氣를 단지 有萬不齊한 차등적 존재로 보는 시각에서는 앞에서 전제된 두 가지 명제, 즉 ‘心是氣’와 ‘心體純善’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四] 그러므로, 氣는 현상 속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 본체의 실상은 순수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五] 결국, 차별없는 순선한 心體는 바로 보편적고 순수한 氣라고 할 수 있으며, 인간의 本性의 선함도 心을 이루는 氣의 순수함에 근거하는 것이다.

  녹문의 이러한 생각은 氣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주자학의 테두리 안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녹문은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 줄 수 있는 근거를 張載의 氣一元論에서 구하였던 것이다.  결국, 녹문은 ‘氣’를 보편적이고 순선한 본체로 보는 張載의 氣 개념에 의거하여 자신이 고민해 오던 心體의 純善性 문제에 대한 답안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의 理氣 이론, 더 나아가 그의 철학 전체를 새로운 구조로 바꾸어 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29)

  2. 本體論


  녹문의 철학이 뚜렷한 자기 모습을 정립한 것은 48세부터 49세 사이에 그가 公州 鹿門에 은거하던 때일 것으로 추정된다. 生生의 능력을 가진 氣를 중심으로 자연과 인간의 문제를 해석하는 제반 이론들이 바로 이 시기에 쓰여진 <鹿廬雜識>에 집약적으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녹문의 본체 개념에서 드러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성대한 본체에 가득차 있는 그것이 내용이 生을 지향하는 우주적 의지(生意)로 표현되었다고 하는 점이다.30) 이것은 녹문이 학문 생활의 초년기부터 일관되게 추구해 온 ‘天地生物之心’을 매개로 한 天人關係의 규명이라고 하는 문제의식이 그의 본체론에 극명하게 투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녹문이 바라본 본체로서의 우주는 이같은 生의 意志에 가득찬 거대한 생명체였다. 그 전체에 관류하고 있는 生의 原動力은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자기 운동을 지속한다.없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사물들을 산출함으로써 자신의 生意를 구체적인 사물의 생명현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녹문은 이 本體氣의 자기운동에 의해 무형무적한 본체에서 구체적인 사물로의 변환이 일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형무적한 본체의 상태에서 구체적인 사물의 元素가 되는 五行으로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다.31)  이 원소들은 우주의 곳곳에서 분분하게 떠돌아다니다가 서로 만나게 되면 합쳐 응결하게 된다.  자연 만물의 구체적인 형상은 바로 이 과정에서 나타난다.  미세한 원소들의 응취는 어느 경우에나 똑같이 일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 만남에 따라 다양한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본체의 응취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다양성을 녹문은 大小ㆍ正偏ㆍ剛柔ㆍ淸濁이라는 말로 표현하였다.32)

  본체로부터 현상 사물로의 분화에 대한 녹문의 이같은 설명은 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장횡거의 기철학에서 언급된 내용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33) 녹문이 보다 큰 열의를 가지고 창의적으로 전개한 이론은 이렇게 해서 생성된 자연 사물과 본체와의 연관 관계이다. 녹문은 氣의 응취로 이루어진 다양한 사물 속에는 그 어느 것에나 본체의 진면목, 즉 그것의 활발한 生意가 통투해 있다고 주장한다.34) 이는 물론 다양한 물상 속에 理의 보편성이 통투해 있다고 하는 전통적 理一分殊論의 논리를 차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理의 보편성’(理一)을 ‘本體氣의 보편성’(氣一)으로 대체함으로써 形氣를 초탈한 理가 아닌, 구체적 생명현상의 바탕인 氣 자체가 본체의 보편적 순수성을 항구적으로 보유하고 있음을  주장하였다.35) 

  理의 보편성으로 간주되어 오던 본체의 순수성이 실은 氣의 보편성에 의거하는 것임을 밝힌  이 새로운 이론(氣一分殊說)의 의의는 본체와 사물을 관통하는 보편성이 그 사물의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도록 한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에서도 理氣의 不相離를 이야기하기는 하였지만, 그 理ㆍ氣는 각각 독립적인 실체였기 때문에 본체(理)의 보편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곧 氣로 이루어진 개별 사물의 가치를 높여 주는 논의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人物性同異論辨의 와중에서 인성의 윤리적 가치에 주안점을 두었던 洛派 학자들이 性論에서는 理一의 보편성을 강조하다가, 心論에 들어와서는 부득이 心氣의 湛一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녹문은 理의 보편성(理一)을 氣의 보편성(氣一)으로 대체함으로써 인간의 구체적 정신현상의 토대인 心을 본체와 상통하는 순선한 것으로 설명하기 위한 전제를 마련하였다.


  3. 人性論


  녹문의 인성론은 그 당시 기호지방 성리학계의 공통적인 관심사, 즉 人物性同異論에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 녹문이 파악한 호락양론의 문제점은 그것이 모두 ‘인간 고유의 존엄성’을 주장하거나(人物性異論), ‘인간의 마음의 보편적 순선성’을 주장하여(人物性同論), 맹자 ‘性善說’의 계승을 명분으로 세우고 있지만, 그러한 주장의 이론 근거로 삼은 주자학의 理氣二元論과, 孟子 性善說의 입장 사이에는 모종의 모순점이 게재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녹문은 心에 악의 요소가 있다고 하면서도 심의 명덕은 심기와 무관하게 허령불매하다36)고 한 南塘의 心說에 대해, “心은 악한데 性은 선하다.  氣는 어두운데 理는 밝다고 하는 것은 단지 理와 氣, 心과 性을 판연히 두 개의 사물로 구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선과 악이 상대하여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하고 있다는 꾸짖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비판하였다.37)  또한 그는 人物性同을 주장한 도암의 심설에 대해서도, 그의 주장 속에 기가 청탁부제한 것이라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음을 밝히고, 이것은 심체의 순선을 주장한 그의 심설의 전체적인 내용과 모순을 이룬다고 하는 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38) 녹문의 이같은 비판에 담긴 뜻은 心氣의 淸濁不齊를 전제하는 한 人性의 善은 결코 확립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의 心氣는 차별없이 순수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녹문은 아무리 明德의 허령통철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心氣本色의 담일을 인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국 인간의 내면에 선ㆍ악이 상대해 있다는 주장이 됨을 면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녹문은 맹자가 밝힌 성선의 의미를 초월적인 理의 善이 아니라 구체적인 心의 善, 더 나아가 그 심을 구성하는 氣의 善에서 찾은 것이다.  녹문은 자신의 이와 같은 이론을 “인간의 善은 氣質의 善일 따름이다.  기질 밖에 따로 선한 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39)라는 말로 결론지었다.

  녹문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성이라 함은 인간이라는 구체적 실재에서 나타나는 특질(氣質之性)을 말함이다.  녹문은 이것에 善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때만 성선의 합리적 해명이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녹문은 우주의 본체를 生意의 氣로 상정하고, 만물이 모두 이 氣를 품부받아 그 고유의 생명현상을 영위한다고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인간은 湛一한 氣의 正通한 응취로 生意의 전체를 치우침 없이 발현하는 존재라고 한 것이다.40)

  이상과 같은 같은 녹문의 心說은 그의 우주론 및 理氣 개념의 전제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그다지 흠잡을 데 없는 체계를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논리의 문제를 떠나 그의 주장을 대부분의 인간들에게서 나타나는 그들의 현실적인 모습과 비교해 보면 거기에는 또 하나 해명해야 할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湛然한 氣의 正通한 응취로 빚어져 순선한 心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서 왜 부도덕한 사고와 행위가 나오는가 하는 의문이다.

  인간의 善性은 그 氣質의 正通性에 기인한다고 한 鹿門은 이 惡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 ‘渣滓’라는 개념을 도입하였다.  사재란 무엇인가?  녹문은 순선한 生意의 氣가 혼백, 혈기, 내장, 지체 등의 구체적인 형질로 응취될 때, 나타나는 五行 상호간의 상대적이고 부분적인 과불급을 사재로 지칭하였으며, 顔子의 거칠은 점이나 孟子의 영기도 사재의 일종이라고 하였다.41)

  녹문의 사재는 인간의 내면에 본체와 대립하여 서서 본체의 선성을 가로막는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본체 자신의 형질로서, 자기 덕성의 발현에 완급의 영향을 미치는 환경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더우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사재는 비록 본체의 유행에 영향을 미친다고는 하나, 그것을 궁극적으로 제약할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녹문은 氣質 속의 渣滓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湛一한 인간의 氣가 渣滓의 累를 입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임을 누누히 강조한다.  渣滓가 인간 氣質의 正通性을 항구적으로 엄폐하여 그를 영원히 비도덕적으로 만드는 일는 결코 일어날 수 없음을 주장한 것이다.42)


  4. 修養論


  본체론, 인성론에서 탐구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실천에 접목시키는 것이 바로 수양론의 역할이다. 성리학의 전통적인 심성 수양법은 ‘敬의 공부’였는데, 敬 공부의 대표적인 주창자인  伊川은 그것의 구체적인 내용을 ‘主一’이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은 외물에 이끌려 마음을 이리저리 방황하게 하는 것을 막고, 내 마음의 내면에 집중하여 그것을 바르고 우뚝하게 세우는 것을 말한다.43)

  녹문 역시 내면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노력을 ‘敬의 공부’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활발한 우주적 生意를 氣라는 이름의 본체로 상정한 녹문에게 있어서는 그 내면의 마음 또한 단지 고요하기만한 부동의 실체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유행을 계속하는 활성적인 神明이었기 때문에  녹문의 敬은 伊川의 敬에 비해 ‘道體의 직접적 體認’이라고 하는 특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녹문이 생각한 敬은 處事接物時에 그것에 專一하여 마음을 흐뜨러뜨리지 않게 하는 노력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 내 마음이 바로 도체의 순수하고도 그침이 없는 유행임을 체인하는 것이었다.

  녹문이 생각한 ‘敬의 공부’의 의미는 그가 말년( 1779, 68세 )에 저술한 <存存龕記>라는 제목의 글에서 살필 수 있는데,  이글에서 녹문은 程明道의 말을 인용하여 敬의 새로운 의미를 밝히고 있다. 녹문에 의하면 학자의 수양 공부를 가리키는 ‘敬’은 그 자체로 도체의 활발한 유행을 뜻한다는 것이다.44)

  녹문은 主一의 一을 인간의 性體ㆍ心體로 이해하였으며, 그 一에 주력하는 敬은 性體ㆍ心體를 그침없이 보존(存存)하는 일로 보았다.45)  그런데 이러한 보존은 작위로서 하는 일이 아니며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일이다. 왜 그런가?  道體인 誠은 모든 사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림이 없는 것으로서 간단없이 유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聖體ㆍ心體를 보존하는 敬은 부단히 유행하는 誠과 동일한 것이다.  양자의 사이에 구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誠이 공부의 대상인 본체를 말하는 것인 반면, 敬은 공부의 주체인 인간의 입장에서 말한 것일 따름이다. ‘敬’에 대한 이같은 설명에서 살필 수 있는 녹문 수양론의 진면목은 한 마디로 ‘本體卽工夫’, 즉 내 마음 속에 도체의 완전한 모습이 구현되어 있으니 공부는 바로 그러한 도체의 자발적이고 자연스러운 유행이라는 것이다. 녹문은 공부가 곧 본체이고 본체가 곧 공부임을 알아야 비로소 敬을 말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修身ㆍ齊家ㆍ治國ㆍ平天下와 같은 儒家의 실천 과제는 모두 그같은 ‘本體卽工夫’의 체인ㆍ확충의 결과라고 하였다.46)

  녹문이 이렇듯 인간의 수양 공부를 약동하는 도체의 부단한 유행의 연장으로 이해하여 본체즉공부의 수양론을 정립한 것은 우주의 본체와 인간의 심성을 동일한 生意의 氣로 해석한 그의 본체론ㆍ인성론의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지극히 자연스러운 귀결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朱陸折衷的인 경향을 띠었던 景逸 高攀龍(1562-1626)의 저작을 접하고, 그 속에서 本體와 工夫를 일치시키는 수양 이론을 발견한 데 기인한다고도 보여진다.  녹문의 시편 가운데 高景逸이 쓴 <靜坐說>을 인용한 부분이 있는데,47) 여기에서 녹문은 본체와 공부를 일체시하는 경일의 수양론을 소개한 후에  “진실로 체험에서부터 얻지 않았다면, 어찌 이처럼 친절하고 맛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평하였으며,48) 그로부터 10년 후에 쓰여진 <존존감기>도 실은 경일의 <정좌설>과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녹문의 수양론은 경일에게서 영향받은 요소가 적지 않았다고 보여지지만, 그가 경일처럼 직접적으로 心學의 本體工夫論을 수용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녹문의 경우, 그의 저술 어디에서도 그가 陸王系列의 학문을 의식적으로 추종한 흔적을 찾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德性을 더욱 活性的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가 시도했던 朱子學에 대한 개신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인간 心性의 主體性을 강조한 陸王學의 이론에 접근하는 면모를 보이게 된 것이다.49)



III.  鹿門哲學의 意義



  鹿門 任聖周는 자신의 윤리적 신념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였던 모범적인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성리학의 이론면에서도 큰 공을 남긴 철학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湖․洛의 人物性同異論爭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조선성리학의 근본 문제를 자신의 과제로 계승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한 철학적 탐구의 노력을 수행하였다.  녹문에게 주어진 철학적 과제란 존재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를 일치시키는 성리학의 논리구조 속에서 인간의 자발적인 도덕실천의 능력을 밝히는 일이었다.  이것은 中國 宋代의 철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그 기본 방향이 정립된 과제였지만, 그것이 조선의 성리학자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후대로 갈수록 더욱 격렬하게 문제시되어진 이유는 성리학의 이론 체계와 그것의 이념적 목표 사이에 미묘한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은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능력을 천명하고 그것의 실천을 유도함으로써 윤리적 이상사회를 구현코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출발한 학문이었지만, 그러한 도덕 능력의 내원을 초월적인 理로 상정함으로써 인간의 도덕적 본성과 현실적 구체성이 이원화되는 문제점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氣의 구체성과 능동성을 강조한 栗谷系 畿湖性理學派 중에서도 倫理志向的인 특색을 강하게 드러냈던 洛論 계열의 학자들은 주자성리학의 그같은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淸濁不齊로만 인식되어 오던 氣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목적한 바는 구체적인 정신현상의 토대인 心에 자발적인 도덕 실천의 능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것이었는데, 理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것(人物性同論)만으로는 이러한 목적을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心을 이루는 氣의 순선성을 함께 주장하기 시작한 것(未發心體純善說)이다.

  녹문은 이와 같은 洛派 학자들의 倫理的 心論을 더욱 분명하게 개진하기 위해서 氣라는 존재가 본체로부터 현상에 이르기까지 그 본연의 순수함을 일관되게 유지한다는 이론을 정립하였다.  이를 위해 녹문은 주자성리학에서 '理'로 설명되어지던 '天地生物之心'(生意)을 '氣'로 대체하였는데, 이때 녹문이 주목한 것은 天地生物之心의 원형인 <<易>>의 '生生之謂易'이나 程明道의 '生意'가 程伊川이나 朱晦庵의 理처럼 철저히 원리화된 개념이 아니라, 그 자체 妙用의 능력을 가진 능동적 실체였다고 하는 점이다. 生의 원리와 生의 작용이 二元化되지 않고 하나로 뭉뚱그려져 자체의 유기적 현상 속에서 만물을 생성하고 그것의 삶을 주관하는 一元的 존재.  녹문은 그것을 우주의 본체로 상정하고 여기에 氣라는 이름을 부여하였으며, 인간의 心은 그러한 氣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본체의 순선한 生意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하였다.

  녹문의 이와 같은 이론의 뿌리는 말할 것도 없이 그가 젊은 시절부터 영향받아 온 洛論의 心說에 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心의 자발적인 도덕실천력 확보를 위해서는 心氣의 湛一純善을 인정해야 한다고 한 陶庵의 心說이 녹문의 一元的인 본체관과 심성관을 정립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녹문이 낙론 계열의 다른 학자들, 예컨대 渼湖 金元行(1702-1772)이나  老洲 吳熙常(1763-1883)의 철학과 같이  理氣二元論의 틀 속에서 心氣의 湛一을 주장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보다 과감하게 理를 氣 속에 흡수해 버린 이론을 제창한 것은, 그가 무엇보다도 整庵 羅欽順, 景逸 高攀龍과 같은 중국 명대 성리학자들의 이론에 크게 공감하여 그들의 철학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기 때문이라고 보여진다.

  羅整庵과 高景逸 두 사람은 모두 朱子學보다는 陸王學의 기세가 높았던 중국 明代에 활동하였던 학자들로서 표면적으로는 육왕학을 반대하고 주자학을 높이는 입장을 취하였지만, 그 사상의 이면에는 육왕학의 영향 속에서 주자학의 문제점을 간파하여 이를 극복하려 한 요소들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다.

  王守仁과 동시대인으로서 그의 최대 논적이 되었던 整庵 羅欽順( 1465 - 1547 )의 학문의 두드러진 특징은 陸王學의 唯心主義에 반대하여 사물에 따라 고유하게 존재하는 物理의 실재와 그러한 법칙에 부합하기 위한 修己工夫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하지만,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요소가 있다. 朱子學의 이름을 내걸었던 그의 학문도 실은 순수하게 회암의 이론을 계승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속에 陸王學에서 이룩한 성리학의 발전적 요소들을 적지않게 수용한 절충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하는 점이다.50) 그는, 주회암이 인간의 본성(理)을 객관적 실체로서 타자화한 것에 반대하고, 대신 理와 氣가 하나라는 理氣一物說을 주장함으로써 인간의 道德 本性을 그것의 현상적 토대인 氣에 일치시키는 과업을 수행하였다.  회암의 理氣二元論에서 정암의 理氣一物說로의 발전은 인간의 도덕 본성을 자기화하였다는 점에서 볼 때 朱子學에서 陸王學으로의 발전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녹문이 정암의 주장에 각별히 동조한 부분은 理를 氣에서 분리시킨 이론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점이다.  정암은 伊川이 “한 번 陰이 되고 한 번 陽이 되는 것은 도가 아니며 그렇게 되는 원인이 도이다”라고 한 것을 적절치 못하다고 여겼다.51) 그는 대신 “陰陽이 바로 道”라고 한 明道의 道器一體觀을 전폭적으로 수용하였는데, 이점에 대해 녹문은 “진실로 그 본 바가 두드러진다”고 상찬하였으며,52) 整庵이 ‘理一’을 ‘氣一’과 동일시하고 ‘氣分殊’를 ‘理分殊’와 같이 본 데에 대해서는 “투철하고 정밀하며 곧바로 궁극에 이르렀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53)

  녹문과 관계가 깊은 또 한 사람의 明代 性理學者는 景逸 高攀龍(1562-1626)이다.  高景逸은 명나라 말기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당시 사회를 학문으로써 구원하고자 했던 東林學派의 주도적 인물로서, 이들 학파의 개혁적 사고가 집권 세력의 탄압을 받게 되자 강물에 투신하여 생을 마친 사람이다. 경일은 ‘마음의 수양'이라고 하는 문제를 평생의 학문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여기에 있어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바는 平常 속에 本體가 있다고 하는 그의 고유한 敬의 철학이다.  경일이 敬을 주장한 것은, 물론 당시의 육왕학이 본체의 자연을 종지로 삼아 공부를 무시하는 폐단에 빠진 것을 구하기 위해서였지만, 敬을 工夫라고 하는 데 그치지 않고, 工夫이면서 工夫를 넘어선 것으로 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암암리에 육왕학의 本體工夫論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54)   따라서 그는 敬의 공부로서의 主一을 논함에 있어서도, ‘一은 본체이고, 主는 공부’라고 하였으며,55) 다시 ‘一’에 대해서는 그것이 ‘平常의 體’라고 하였다.56) 경일에게 있어서는 本體가 곧 工夫이며 工夫가 곧 本體였는데, 이와 같은 수양론에 의해 요청된 그의 本體論과 心性論은 本體와 現象을 하나로, 心과 性을 하나로 보는 것이었다.  이는 ‘理氣同實’, ‘心性一致’를 주장한 녹문의 철학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녹문은 경일이 남긴 글들이 자신의 생각과 전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것을 보고 감격의 마음을 금치 못하였다.57)

  이상에서 살펴 보았듯이 녹문의 철학은 나정암, 고경일 등 명대 성리학자들의 철학과 상당한 유사점을 보인다.  이와 같은 공통점은 녹문 철학의 철학사적 의의를 찾는 작업에 있어 어떠한 시사를 주는 것인가?

  중국 近世哲學의 원류인 朱子學은 그 자체로 매우 정미한 이론 체계를 구축하기는 하였으나, 人間 本性의 主體的 確立이라고 하는 孔孟 이래 유학 일반의 학문 목표를 궁극적으로 완수해 내었던 것은 아니다.  勞思光이 그의 <<中國哲學史(宋明篇)>>에서 지적하였듯이 朱子學의 기초적인 주춧돌은 주체적인 의미의 ‘心’과 ‘性’에 있다기보다 존재적 의미의 ‘理’와 ‘氣’에 있었다.58)  정이천과 주회암은  현상에 지배받지 않는 독립적인 실체로서의 '理'를 상정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도덕 본성의 가치를 높였지만, 그 본성을 구체화하는 氣는 여전히 善惡의 가능성이 혼재된 것으로 두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에 대한 긍정은 미진한 단계에 머물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반해 陸王學의 극성기에 활약하였던 明代의 朱子學者들은 理와 氣를 하나로 묶어버린 理氣一物說을 주창하였고, 인간의 심성이 그 자체로 본체와 일치되는 순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암과 경일의 氣는 회암이 독립시켰던 순선의 理를 자기의 내면에 회복한 순수한 氣로서, 인간 도덕성의 내원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그 氣에 의해 이루어진 인간의 심성은 本然으로서의 性뿐아니라 구체적인 정신작용의 주체인 心까지도 선한 것으로 긍정되어질 수 있게 되었다.

  중국 明代의 朱子學이 陸王學의 자극에 힘입어 문제점을 지양하기에 이르렀다면, 陸王學의 전통이 거의 전무한 조선성리학계에서 녹문이 그와 유사한 학문발전을 이룬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질 수 있을까?  四七論辨에서부터 人物性同異論辨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이어져온 朱子學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성찰이 그러한 결실의 배경이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녹문 철학의 출발점은 人物性同異論辨 당시 同論에 가담했던 학자들이 추구하였던 문제, 즉 보편적이면서 구체적인 인간의 도덕실천 능력을 확증하는 이론의 모색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超形氣의 性이 아닌 인간 덕성의 실제적인 주재자 - ‘心’의 도덕성이 확립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녹문은 氣에서 유리되었던 덕성의 근원 理를 氣와 합치시키고 하나가 된 그 氣를 인간의 心에 일치시킴으로서 ‘인간의 덕성 = 심의 작용’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心의 작용에서부터 本性의 내용을 추연하여 심의 작용이 다르면 본성도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人物性異論을 주장하였다.  출발은 同論이었지만 결과는 異論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理論의 변화 과정 속에서 일관되게 유지된 그의 학문의 기본 방향은 인간은 그 자체로 덕성의 주체가 될 수 있는 필요충분조건이며 여기에는 어떠한 구조적인 장애도 있을 수 없다고 하는 사고였다.




1)  <行狀>, <<鹿門集>> 附錄, 1a - 1b


2)  <行狀>, <<鹿門集>> 附錄, 2a - 2b


3)  <行狀>, <<鹿門集>> 附錄, 2b - 3a


4)  <行狀>, <<鹿門集>> 附錄, 3a


5) <寒泉語錄>, <<鹿門集>>17 雜著, 1a


6) <上陶庵先生>, <<鹿門集>>1, 1a - 6a


7) <行狀>, <<鹿門集>> 附錄, 4b


8) <行狀>, <<鹿門集>> 附錄, 4b / <玉溜講錄>, <<鹿門集>>17 雜著


9)  <書筵講義>, <<鹿門集>>18 雜著


10)  <行狀>, <<鹿門集>> 附錄, 5b


11)  <任實縣量後陳傳令>, <<鹿門集>> 권25 公移, 18a - 19a


12)  <補民廳節目>, <<鹿門集>> 권25 公移, 25a - 26b


13) <邑三弊釐革節目>, <<鹿門集>> 권25 公移, 28b - 30a


14) 同上.


15) <下帖各面都有司>, <<鹿門集>> 권25 公移, 24a - 24b


16) <行狀>, <<鹿門集>> 附錄, 6a


17) <行狀>, <<鹿門集>> 附錄, 7a


18) <官船節目>, <<鹿門集>> 권25 公移, 31b - 32b


19) <鄕任變通節目>, <<鹿門集>> 권25 公移, 35b - 36a


20) <行狀>, <<鹿門集>> 附錄, 9a  /  <<英祖實錄>> 권123, 6a


21) <<英祖實錄>> 권123, 6b


22) <行狀>, <<鹿門集>> 附錄, 9a - 9b


23) <行狀>, <<鹿門集>> 附錄, 10b


24) <寒泉語錄>, <<鹿門集>> 권17 雜著, 1a


25) <行狀>, <<鹿門集>> 附錄, 4a - 4b


26) 屛溪와 陶庵 사이의 心說 논변은 鹿門이 24 세 때인 1735년에 일어났다.


27) <上陶庵先生>, <<鹿門集>> 권1 書, 4b - 5b


28) “幸於中歲以後, 賴天之靈, 有味乎張子湛一之訓, 而知所謂氣質者, 雖淸濁粹駁, 有萬不齊, 而其本體, 則只湛一而已矣. 然後乃見夫心之靈者, 卽氣之靈耳, 非氣外別有靈底心也; 性之善者, 卽氣之善耳, 非氣外別有善底性也.” ( <大學>, <<鹿門集>> 권16 雜著, 2b )


29)  氣를 순선한 本體로 보는 녹문의 새로운 사고를 더욱 강화시켜 준 계기는 그가 <<孟子>> 生之謂性章을 검토하는 가운데 인간의 선한 본성이란 바로 氣로 인해 구현된 氣質之性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결론을 얻게 된 데에 있다. ( <答金伯高>, <<鹿門集> 권6 書, 2a - 3b )


30) “莫之然而然, 自有一箇虛圓盛大底物事.  然浩然, 無內外, 無分段, 無邊際, 無始終, 而全體昭融, 都是生意, 流行不息, 生物不測.”  (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1a )


31) “盖氣之本, 湛一而已; 而分爲陰陽, 分爲五行,  升降飛揚, 感遇凝聚之際, 不能不千差萬別.” ( <與李伯訥>, <<鹿門集>> 권5, 書, 8b )


32) “其升降飛揚, 感遇凝聚之際, 或大或小, 或正或偏, 或剛或柔, 或淸或濁, 自不能不千差萬別; 而隨其凝聚, 各爲一氣, 卽張子所謂: ‘游氣紛擾, 合而成質, 生人物之萬殊’者也.” (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6a - 6b )


33) 본체에서 현상으로의 분화에 대한 녹문의 이론은 장횡거의 다음과 같은 글의 인용이다. 

    “氣 然太虛, 升降飛揚, 未嘗止息, .....  其感遇聚散, 爲風雨, 爲霜雪.  .....  游氣紛擾, 合而成質者, 生人物之萬殊.” ( 張載, <太和篇>, <<張子全書>> 권2 正蒙1 )


34) “雖曰‘各爲一氣’, 所謂氣之本者, 固未嘗不卽此而在, 而各隨其所凝聚, 而發現焉. 如凝聚爲水, 則其潤而下者, 卽是氣之發現, 而成水之性焉. 凝聚爲火, 則其炎而上者, 卽是氣之發現, 而成火之性焉. 由其所遇之剛柔不同, 是以其性亦異. 然莫非是其生意之所爲也.” (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6b )


35) “苟非氣之一, 從何而知其理之必一乎?  理一分殊者, 主理而言, 分字亦當屬理.  若主氣而言, 則曰‘氣一分殊’, 亦無不可矣.”  (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雜著, 4a )


36) <答尹瑞膺>, <<南塘集>> 권13 書, 21a


37) “心惡性善, 氣昏理明, 不但理氣心性判然作兩物, 烏得免善惡相對齊頭竝足之譏乎? .... 夫心氣本色實體也, 虛明氣象影象也, 性之具方寸者, 具於實體乎, 具於影象乎?”  ( <答李伯訥>, <<鹿門集>> 권5 書, 24b - 25a )


38) <上陶庵先生>, <<鹿門集>> 권1 書, 4b - 5b


39) “人性之善, 乃其氣質之善耳, 非氣質外, 別有善底性也. 故曰: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又曰: ‘ 賊人以爲仁義’, 但說人字ㆍ水字, 更不擧性字, 其意可見. 故孟子說性善, 至說浩氣, 其義乃明.( <鹿廬雜識>, <<鹿門集>>19 雜著, 5a )


40) “獨是氣之流行騰倒, 自一原而散萬殊, 由無形而流有形也, 隨其所遇, 而不能無大小․偏正․通塞之分. 其占氣偏小, 賦形壅塞者, 雖曰同稟是氣, 固無以通貫乎其全體. 若人則稟得正且通者以生, 故其方寸空通, 卽此空通, 而是氣全體, 豁然呈露, 無所蔽遮, 而與天地本氣貫通爲一.( <與李伯訥>, <<鹿門集>>5, 7b - 8a )


41) “游氣之凝聚也, 五行之多過淸濁, 萬殊其偏重, [如木氣多, 金氣多之類.] 而過淸[如老釋之類]者雖善, 亦不妨蔽之以渣滓.  盖非陰陽沖和, 五氣均亭, 而全夫湛一本體[聖人氣質], 則雖謂之渣滓可也.  究而言之, 顔子之麤, 孟子之英氣, 亦渣滓也.”  ( <答李伯訥>, <<鹿門集>>4, 23a )


42) “一或有孺子入井之類, 瞥來感觸, 則 然善端便卽闖發, 而其發也, 非乘濁氣也, 亦非理之有造作也, 依舊是仁義之性, 自乘了本然湛一之氣, 闢折了渣滓, 而出來耳.  如此然後, 方見性之眞箇至善, 而渣滓之濁駁, 無與於本體之湛一也.”  ( <鹿廬雜識>, <<鹿門集>>19 雜著, 29b - 30a )


43) <<程氏遺書>>15 伊川先生語1


44) <存存龕記>, <<鹿門集>>20, 50b - 51b


45) “余舊讀程子主一之訓, 只作‘專一’義看了, 如薛文淸公所謂‘行第一步時, 心在第一步上, 行第二步時, 心在第二步上’者. 晩驗之, 始覺其未然. 一只是‘純一’之一, 卽性體也․心體也. 一者誠也, 主一者敬也, 誠敬一也, 但有能․所之別耳.( <主一銘>, <<鹿門集>>22, 4b )


46) “體而達之, 則修己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聖人以神道說敎而天下服也. 是則存存之極功, 而人而天矣.”( <存存龕記>, <<鹿門集>> 권20 記,51b )


47) <心性雜詠>, <<鹿門集>> 권26 詩, 21a - 22a.


48) “此等說話, 苟非眞有得於體驗者, 安能如是之親切而有味也?” ( <心性雜詠>, <<鹿門集>> 권 26 詩, 21b - 22a )


49) 鹿門의 死後 <<鹿門集>> 편찬에 참여한 그의 아우 任靖周와 그 주위의 학인들( 宋時淵, 金相進 등 ) 사이에서 高景逸의 학문이 陸王學에 가깝다는 점과 녹문의 수양론이 그로부터 영향받았다는 사실이 문제되어  金相進(1736-1811, 任靖周의 학우, 金元行ㆍ宋明欽의 문인) 같은 이는 본체공부론을 논한 녹문의 <存存龕記>를 그의 문집에서 삭제할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임정주가 이를 극구 변명하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일들에서 미루어 보면 그 당시 녹문 주위의 인물들 사이에서도 녹문의 수양론에 心學的 요소가 있다는 사실이 일찌기 간파되었었다고 할 수 있다.  ( <答宋靜深>, <<雲湖集>>, 권2 書, 2a - 5a 참조 )


50) 阿部吉雄, <羅欽順>, <<中國の思想家()>> (東京大學中國哲學硏究室, 1963) pp 577 - 583


51) <<困知記>> 上 11 <<理學叢書>> p 5


52)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3b.


53) <鹿廬雜識>, <<鹿門集>> 권19, 10a


54) 岡田武彦, <<王陽明と明末の儒學>> (東京 明德出版社, 昭和45) p 425


55) <箚記>, <<高子遺書>> 권2, 4a (文淵閣四庫全書 1292)


56) <書靜坐說後>, <<高子遺書>> 권3, 21b


57) <心性雜詠>, <<鹿門集>> 권26 詩, 20a - 21a


58) 勞思光, <<中國哲學史(宋明篇)>> p 75